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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임을 그리워하며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참으로 덧없고 무상한 일이다. 그믐밤 어둑한 달꽃이 사방에서 날리고 고향을 잃은 나그네의 가슴앓이가 속절 없는 슬픔이 되어 밀물처럼 몰려올 때면 꿈결 같은 옛 추억들이 처연히 다가온다. 깊어가는 가을녘에 잊혀진 임의 생일을 더듬는 이내 가슴은 실로 아리고 쓸쓸하외다.도산국민학교陶山國民學校의이종구 교수의 문학 산책/도산국민학교의 개교기념일(1918.3.3)을 기리다​작성자dosanlee작성시간20.10.31조회수5,150​​세상에 없는 임을 그리워하며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참으로 덧없고 무상한 일이다. 그믐밤 어둑한 달꽃이 사방에서 날리고 고향을 잃은 나그네의 가슴앓이가 속절 없는 슬픔이 되어 밀물처럼 몰려올 때면 꿈결 같은 옛 추억들이 처연히 다가온다. 깊어가는 가을녘에 잊혀진 임의 생일을 더듬는 이내 가슴은 실로 아리고 쓸쓸하외다.​도산국민학교陶山國民學校의 개교기념일은 언제일까? 개항기 무렵일까, 아니면 일제강점기일까? °한국 근대사를 보면 이 시기에 수많은 교육기관들이 명멸하며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웠다.°주) 한국 근대사의 시기는 대략 강화도 조약 체결(1876)때부터 광복(1945)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는 개항과 개화 그리고 갑오개혁, 대한제국 수립, 일제강점기 등 격동의 시대였다.​최초 민간 근대학교인 원산학사(1883ㆍ원산)에 이어 배재학당(1885ㆍ최초 남자학교 이승만 졸업ㆍ미션스쿨), 경신학교(1885ㆍ미션스쿨), 광혜원(1885ㆍ미션스쿨), 육영공원(1886ㆍ최초 근대식 공립교육기관 및 영어교육기관, 고종 설립), 이화학당(1886ㆍ최초 여자학교ㆍ미션스쿨), 한성사범학교(1895ㆍ교원양성기관ㆍ관립), 홍화학교(1895), 숭실학당(1897), 배화학당(1898), 점진학교(1899ㆍ평남강서 최초 남녀공학 안창호 설립), 서전과 서숙(1906ㆍ만주 용정), 삼흥학교(1906ㆍ평양진남포 안중근 설립 및 교장), 오산학교(1907ㆍ김소월 1919년 졸업), 양산학교(1907ㆍ안악 김구 설립), 협동학교(1907), 대성학교(1908ㆍ평양 안창호 설립), 명동서숙(1908), 선명학교(1909ㆍ예안), 보문의숙(1909ㆍ토계), 보강학교(1909ㆍ재령 김구 교장), 신흥학교(1911), 오치서숙(1919ㆍ윤봉길 수학) 등 우리나라 근대 교육사에 빛나는 이름들이 많았으며 학교 성격도 공립, 사립, 종교(미션스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정신문화의 수도이자, 유학의 본고장인 안동은 향학열이 높아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 무려 30여 개의 사설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구국계몽운동의 역할까지도 담당한 이들 사설 교육기관은 대부분 문중과 서원에서 재정을 맡았으며 교사로는 서당과 정자를 보수해서 쓰거나 혹은 문중의 큰 한옥건물(고택)에서 공부를 하는 형태였다. 이를테면 임하에 있는 협동학교(초대 교장 김병식)가 1907년 여강서원의 재산을 기금으로 가산서당(의성김씨 문중 서당) 자리에 학교를 세웠고 1909년 토계리의 보문의숙은 도산서원 자산을 기반으로 진성이씨 문중이 계남고택에 사립 초등교육기관을 만든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학사, 공원, 서숙, 의숙, 강습소(강습회), 학원, 학당, 원, 사숙, 학교 등은 당시 사설 혹은 공립 교육기관의 명칭이었다.​일제강점기 때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은 도ㆍ부 ㆍ군 아래 각각 도청ㆍ부청ㆍ군청의 소재지가 있었으며 다시 면ㆍ동ㆍ리 등으로 세분 하였다(1914년 4월1일, 일제가 강행한 군면 통폐합 조치로 도산면은 가송 단천 분천 온혜 운곡 원천 의촌 의일 태자 토계 등 10개 동으로 개편 되었다). 근대 시기에 안동 지역에 포진한 학교의 명칭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안동 최초 근대식 신식 학교인 임하의 협동학교(여강서원 재산을 기금으로 함), 동흥학술강습회(임청각), 화산학원(화성동), 계명학교(법상동), 옥계서숙(율세동), 봉양서숙(송천), 역동의숙ㆍ광명학교(풍산), 동화학교(하회), 일직의숙(일직), 동양학교(와룡 가구리), 용흥학술강습회(와룡 지내리), 선명학교(예안), 긍구당사숙(분천동ㆍ분강서원 재산을 기금으로 함), 보문의숙(토계리ㆍ도산서원 재산을 기금으로 함) 등 이다. 여기에서 임하에 있던 협동학교 관련 얘기를 조금 더 언급한 후에 도산국민학교의 역사를 기술하기로 한다. 1907년 임하 천전 내앞마을에 류인식(퇴계학파, 항일 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 제자), 김동삼(부친은 백하 김대락, 호는 일송, 퇴계 학풍 계승, 신민회 회원, 신흥강습소 설립 참여, 1918년 김좌진 등 38인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 발표, 1931년 만주사변 때 체포 옥사), 이상룡(호는 석주, 1925년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임청각이 생가) 등이 세운 협동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혁신적인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한 교육기관으로 경북 북부지역의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며 3.1운동까지 펼치다가 폐교 당하기도 했다. 협동학교는 경북 북부지역 애국계몽운동의 효시이자, 신민회가 이 고장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거점 역할를 수행하는 의미도 함께 지닌 민족정신이 투철한 학교였다.​1907년 가산서당에서 시작한 임하의 협동학교는 1909년 내앞마을 원로인 백하 김대락 선생의 사랑채로 교사를 이전했다. 안동 혁신유림이자 애국지사들인 김대락, 이상룡[임청각에 동흥학술강습회 설립,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 영구 이은숙 선생의 회고록 ;에 보면 석주 이상룡 선생을 이상룡씨는 경상도 혁명 대표로 오신 분으로 공사간 의논하는 분이라...고 서술해 놓았다], 김동삼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며 당시 서울에서 전재산(2021년 현재 가치 2조원 이상 추산)을 팔아서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전부 바친 8명의 판서 배출 명문가인 우당 이회영(1906년 만주 용정 서전서숙 설립에 관여, 1907년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 발족 및 헤이그 밀사 파견 주도, 1924년 의열단 후원, 1932.11.17 독립운동 중 체포, 고문을 받다가 만주 뤼순 감옥에서 순국, 1962년 대한민국 정부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성재 이시영 선생(1948년 초대 부통령) 6형제와 함께 모여서 항일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1911.6.10 신흥강습소, 초대 교장 이동녕/ 1912.7 신흥무관학교로 변경ㆍ초대 교장 이상룡)를 설립했다. 일제 치하 조국 광복을 위해 서간도(현재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자리)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는 3,500여 명의 독립투사들을 배출하며 항일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해방 후 신흥무관학교는 경희대학교로 개칭한 연혁 속에서 우여곡절의 내력을 안은 채 여전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희대학교 역사를 보면 해방 후인 1949년 5월, 신흥초급대학의 설립 인가가 이루어졌으며 1960년에 신흥대학교를 경희대학교로 변경했다.​임하의 협동학교는 가산서당의 자리에 위치했으며 이후 출범한 천전국민학교가 1999년에 폐교된 뒤에는 현재 안동독립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이외에도 안동에는 언급되지 않은 학교들이 더 많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옛날부터 정신문화의 수도답게 교육열이 충만한 고장이었다.​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에 위치한 계남고택(하계마을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당호를 '계남댁'이라고도 함)의 사랑채를 교사로 둔 보문의숙寶文義塾(1909.12~1918.3.2)은 진성이씨 문중학교이자, 서원학교이며 초등과정의 신식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보문의숙은 1907년 가산서당에서 설립된 임하의 협동학교와 더불어 안동 지역의 근대 교육을 주도하고 선도해나간 대표적인 신식 문중학교였다.​학교 설립에 동원된 재원 조달 방식은 보문의숙의 기본자산이 된 도산서원이 기부한 일부 전답과, 설립 발기인 7명 가운데 한 명인 하계 계남고택 주손이자 소유자인 이상호가 교사로 기부한 계남고택 사랑채와, 학교 설립 총회 때 문중 인사들이 기부한 3백여원의 의연금이었다. 설립 발기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진성이씨 원촌파였으며 교장격인 초대 숙장도 이육사의 조부인 원촌파 치헌 이중직 선생이 맡았다.보문의숙 설립의 선봉에 나선 인사는 퇴계 상계파 13대 종손인 이충호 선생이었다. 그는 도산골 퇴계 종손으로서 신시대 변화에 탑승하고 책무를 다하기 위해 소명의식을 가지고 신식 교육기관 설립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1910년 3월31일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제목인 '영남개진의 선봉 嶺南開進의 先鋒'에는 퇴계 종손인 이충호가 보문의숙 설립에 주동자로 나섰다고 치하하고 있다.&quot참고문헌: 신준영(2015), 안동 보문의숙 연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학위논문, p.11, 17.》​1909년 이충호가 주도하여 설립한 토계리 192번지에 위치했던 보문의숙은 1916년 10월20일 토계리 지번 88번지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여 개교식을 했다. 이에 필요한 부지 3,500여 평의 전답도 이충호가 기부했다. 행보에서 나타나듯 그는 선각자다운 면모를 갖춘 인사였다. 보문의숙은 신교사에서도 약 17개월 동안 계속해서 이 명칭을 쓰다가 1918년 3월31일 공식적으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은 후 '사립 문중학교'에서 '공립보통학교'로 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 개편되었다. 보문의숙에 다니던 학생들도 연이어 4월1일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당해 연도 9월에 신교정에서 정식으로 '개교식'을 가졌다. 수몰 전 우리들이 공부했던 '도산국민학교'바로 그 자리였다.​《보문의숙은 1909년 12월에 도산서원 자산을 기반으로 퇴계 상계파 13대 종손 이충호, 계남고택 주손이자 소유자인 이상호 등의 진성이씨 문중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이며 1918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서 개편, 편입되기 까지 토계리 계남고택 사랑채를 교사로 사용했다. 출처: 이육사 문학관》​도산골은 단순히 향학열만 높은 향촌은 아니었다. 안동 지역은 익히 알려지다시피 전국에서 가장 많은 36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특히 퇴계 자손들이 밀집해 있는 토계리 주변은 도산골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아니 도산골 전체가 독립운동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이육사(원촌동ㆍ도산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와 같은 선각자와 독립지사들이 숱하게 배출되어 난세에 나라를 구하는 의인이 되었다. 특히 대한제국 말기 의병장 향산響山 이만도 李晩燾(1842~1910년) 선생의 가문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그 인원조차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 한국의 근대화 시기는 이처럼 선각자들이 앞장서서 설립한 계몽적인 성격을 지닌 공ㆍ사립 교육기관과 애국정신이 난세와 결합하여 독립운동과 투쟁으로 이어졌다.​보문의숙이 우리들이 공부한 구교정 자리로 이건한 것은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개명) 되기 17개월 전인 1916년 10월20일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말해 구교정 자리로 이사는 먼저 갔고 명칭은 나중에 편입되면서 바뀐 것이다. 이후 일제 치하인 1941년 일본은 자국내 국민학교령에 의해 기존의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통일시켰으며 자연히 식민지인 우리나라에도 이 제도를 강제로 적용시켰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도산공립보통학교는 1941년 4월1일부터 도산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이렇듯 안타까운 유래를 안고 태동되었으며 1996년이 되어서야 식민사관청산차원에서 대한민국 방식인 초등학교로 전격 변경하게 된 것이다(대한민국 정부 1996.3.1부터 초등학교 명칭 시행). 하지만 도산국민학교는 1993년에 폐교되었기에 초등학교라는 명칭을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역사 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 부분이 하나요, 또 하나는 도산국민학교 그 자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비록 우리나라 명칭인 초등학교라는 교명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폐교가 되었지만 도산국민학교라는 그 이름으로 함께 했던 그 지난하고 굴곡진 많은 세월과 겹겹이 깊이 쌓인 숱한 정은 우리 세대에 있어서는 어쩌면 초등학교 이상의 연연함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명칭이 부여하는 시대적인 아픈 우여곡절사가 지닌 가타부타의 의미를 다 차치하고 도산국민학교는 그저 우리들에게 수몰의 역사로 잃어버린 모교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과 사모의 정과 그리움의 정만 모질게도 깊이 간직한 채 아리고도 아름다운 깊은 상념의 대상으로만 자리하고 있다.​다시 보문의숙과 도산국민학교에 대한 유래와 명칭을 재정리해보기로 한다. 보문의숙의 초대 숙장(지금의 교장 지위)은 육사의 조부인 치헌 이중직 선생이 맡았다. 보문의숙은 1918년 토계리 88번지에 지번을 정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은 후 사립교육기관에서 공립학교로 개편, 편입되었다. 그리고 식민지하인 1941년 일본의 '국민학교'개편령으로 인해 일본과 한국이 모두 국민학교 명칭으로 통일 되기에 이른 것이다.《보문의숙의 학제는 그간 초등학교 과정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보문의숙 1회 졸업생인 이원영의 졸업증서와 우등증서, 교과서와 신문ㆍ잡지 기사를 분석해보면 보문의숙은 3년제 중등학교이자 고등교육기관으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로서는 임하의 협동학교와 더불어 지역에서 최고 학부였다. 출처: 신준영(2015), 안동 보문의숙 연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학위논문, p.43.》​필자가 이리저리 흩어진 사료와 논문과 자료들을 탐색, 고찰, 추정해볼 때 도산국민학교의 역사는 대략 이렇게 종합 정리된다.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도산국민학교 연혁]●1909.12 : 보문의숙 설립 및 존속 기간(1909.12~1918.3.30) 진성이씨 문중학교이자, 도산서원 자산을 기반으로 출범한 서원(서당)학교. 설립자는 퇴계 선생의 상계파 13대 종손인 이충호를 비롯한 총 7명의 진성이씨 문중 인사들로 구성됨. 초대 교장격인 숙장은 이육사의 조부인 치헌 이중직 선생이 취임. 보문의숙의 지번은 도산면 토계리 192번지에 있는 이상호 소유의 계남고택 사랑채에서 출범, 운영됨('계남'은 상계에 위치한 퇴계종택의 남쪽에 자리해서 붙여진 지명임 혹은 하계 남쪽에 위치해서 '계남'이라 지칭함. 일명 '계남댁'내지 '계남경주댁溪南慶州宅'이라고도 함. 이상호의 선대 이만운 선생이 경주부윤을 지낸 이력이 있음)참고문헌: 신준영(2015), 안동 보문의숙 연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학위논문, p.1.●1912.3.24 : 보문의숙 1회 졸업생 배출●1916.10.20 : 계남고택의 보문의숙이 토계리 88번지(토계 도산국민학교&quot자리)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여 개교식(보문의숙이 이전한 교사에서 개교식 함. 명칭은 여전히 보문의숙)을 거행함♤보문의숙의 계남고택 교사 사용기간 : 1909.12~1916.9●1918년 3월3일 도산공립보통학교 '개교'※ 3월31일 날짜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공식적으로 설립 인가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새로운 학기가 3월초에 시작되는 만큼 도산공립보통학교의 명칭으로 신교사에서 3월3일 일단 '개교'하여 수업하고 이어 3월31일 정식 '설립 인가'를 받고, '개교식'거행은 9월에 한 것으로 추정됨※도산국민학교 연혁에 개교일이 '1918.3.3'로 나와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연유됨●1918.3.31 : 보문의숙이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공식적으로 설립 인가를 받아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편, 편입됨●1918.4.1 : 보문의숙 전 학생(전교생)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1918.9 : 도산공립보통학교 '개교식'거행●1919.3 : 도산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 배출​[독립운동가 이육사]ㅡ1916(12세) 보문의숙 수학ㅡ1918 도산공립보통학교 1회 입학생으로 편입ㅡ1919(15세) 도산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1918.3.31~1941: 도산공립보통학교&quot존속기간●1941 : 일제강점기 일본 자국내 초등교육기관 명칭을 국민학교로 통일, 1910년8월22일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이 피탈된 대한제국도 국민학교로 변경●1941~1993.3.1 : 도산국민학교&quot교명 사용기간●안동댐 준공(1976.10.28)에 따른 토계리 수몰로 도산국민학교 1975년 2학기부터 단천리 532번지 신교사에서 수업함(당시 1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단천 신교정으로 옮겨가서 수업하고 6학년들은 토계 구교정에서 2학기 수업 후 이듬해 2월에 구교정에서 마지막으로 졸업한 세대가 됨). 단천 신교사는 1975년 1학기 말에 완공됨●1976.2.13 : 토계에서 열린 57회 졸업식이 구교정(토계)에서 거행한 마지막 졸업식임●1993.2.19 : 단천 신교정에서 열린 74회 졸업식이 도산국민학교의 마지막 졸업식이 됨●1993.3.1 : 도산국민학교 폐교(졸업생 3,151명 배출)■대한민국 정부(교육부), 1996년 3월1일부터 식민사관 청산차원에서 기존 국민학교&quot명칭 대신 초등학교로 변경함※ 도산국민학교는 1993년 폐교됨에 따라 초등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해 본 적이 없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도산국민학교(1918.3.3~1993.3.1) 역사에 만약 보문의숙까지 넣는다면 84년(1909.12~1993.3.1) 동안 존재했고 아직까지 학교가 존속했다면 102년(1918~2020)의 연혁이 되었을 것이다. 좀더 나아가서 보문의숙부터 지금까지 교정이 존립하고 있다면 무려 111년(1909~2020)의 교령을 지닌 세기적인 학교가 탄생했을 것이다. 학교 역사에 대한 이런 산정은 임은 갔으나 아직 형체(단천 신교정)는 남아 있기에 추정해볼 수 있는 공상이지만 쓸쓸하고 처연한 망상이기에 접어두기로 한다. 이는 마치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공식 역사에 넣느냐 마느냐 하는 논리와 비슷한 맥락이 될 수도 있으므로 와전을 경계하며 삼가하기로 한다.​이렇듯 도산국민학교는 여러 차례 개명을 하면서 우리들과 역사적인 인연을 맺었다. 일본은 1941년 자국에서 국민학교령에 의해 이전까지의 소학교를 대신하는 초등교육기관으로 국민학교를 출범시켰는 데 이 명칭이 해방된 대한민국 시대까지 이어지면서 그대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나라의 초등교육기관의 이름까지도 강제로 자국처럼 국민학교로 통일시켜 버린 것이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 이렇게 55년 동안 존치되어 오다가 1996년 범국가적인 식민사관 청산차원에서 초등학교로 공식적으로 변경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토계리 하계마을에는 이렇듯 뿌리와 터전이 같은 하나의 학교가 보문의숙, 도산공립보통학교, 도산국민학교 등 3개의 다른 명칭으로 84여 년에 걸쳐 사립 초등교육기관에서 공립 초등교육기관으로 편입과 개명을 거듭하며 존속해 온 것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초등교육기관 명칭 변천사​[여기서 대한민국의 근대사에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변천해온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을 시기별로 요약해보기로 한다.근대화기이자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던 1895~1905년까지는 소학교&quot였으며 이후 1906~1937년까지는 보통학교를 사용했다. 그리고 1938~1940년까지는 심상소학교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이 1886년 제정한 소학교령에 따라 설치한 초등학교이다. 즉, 초등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최초 단계의 교육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심상(尋常)이란 대수롭지 않고 예사롭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심상치 않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예사롭지 않다는 의미이다. 다시말해 보통이거나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심상소학교란 보통 혹은 평범한 소학교라는 뜻이다.일제는 1941년 칙령148호 국민학교령을 발령하여 기존의 대한민국이 사용하던 명칭을 국민학교로 변경하였다. 국민학교란 황국신민의 학교&quot즉, 일제강점기 하에서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제국주의 초등교육정책의 기조를 담고 있다. 이러한 국민학교의 명칭은 1941~1995년까지 이어져오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정부는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당해년 12월29일 교육법 개정을 통해 이듬해인 1996년 3월1일부터 초등학교로 전격 명칭 변경을 하게 되었다. 무려 56년 만에 대한민국식 명칭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일제가 사용한 국민학교의 명칭은 나찌 독일(NS-staat: 1933~1945년까지 나찌당과 아돌프 히틀러 총통 치하기)이 전체주의 교육을 표방하면서 부른 폴크스 슐레(Volks schuleㆍ국민학교)에서 기인한 것이다. 독일어로 폴크(Volk)는 민족 내지 국민을 뜻하며 슐레(Schule)는 학교를 말한다.]-----------------------------------------------------​퇴계의 14대 손인 육사 선생[1916년 12세ㆍ보문의숙에서 수학, 1918년 도산공립보통학교 1회 입학생(보문의숙을 공립 보통학교로 개편)]은 1919년에 도산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15세)이 되었으며 마지막 졸업생은 단천(대사, 대세, 단사)으로 이전한 도산국민학교 신교정에서 1993년 배출한 74회 졸업생이었다. 신교정을 짓고도 오히려 폐교가 된 것은 매우 의아스러운 일이지만 수몰(안동댐ㆍ안동시 성곡동 소재 다목적 댐 1971년 착공, 1976년 준공) 지역의 아픈 내막들이 얽혀 있기에 알고보면 그리 아이러닉한 일도 못된다. 1919년 1회 졸업생은 토계리 88번지가 터전인 도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었으며 마지막 졸업생은 1975년 2학기에 단천으로 이전한 신교정에서 1993년 2월19일에 졸업한 74회 5명의 학생들이었다(남은 재학생 17명은 인근에 있는 온혜국민학교로 옮겼다). 신교정은 단천으로 이전한 후 18년 동안 존속하다가 1993년 지난한 세월의 이력을 갈선대(葛仙臺ㆍ일명 칼선대) 아래 강물 속에 모두 묻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회생시킬 수 없는 삶과도 같은 운명이었다[1993년 3월1일 도산국민학교는 온혜국민학교와 통폐합하면서 폐교되었다. 이농현상과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감소 등 이 시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ㆍ구조적 문제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온혜초등학교 72회 졸업(2021.2.5), 졸업생 총 3,017명 배출, 전교생 총 15명(남 10명, 여 5명), 교원 9명/ 73회 졸업(2022.2.11: 졸업생 5명), 졸업생 총 3,022명 배출)].​단천에 있는 신교정에는 오랜 세월 풍상우로에 지친 나머지 이끼와 검버섯이 핀 모습으로 이제는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전설적인 선구자의 잔상을 만날 수 있다. 맞은편에 천년만년을 굳센 기상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청랭한 갈선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초라한 몰골이다. 숨은 끊어진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형체는 남아있다. 이른바 폐교를 명시한 교적비이다.​산전수전과 만고풍상을 겪은 100여 년의 역사가 서린 선구자의 지친 흔적이 남아있는 교적비. 이제는 글씨 조차 알아보기 힘든 빛바랜 유산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교적비도산국민학교1918년 3월 3일 개교하여졸업생 3,151 명을 배출하고1993년 3월 1일 폐교되었음1995년 3월 1일경상북도교육감​※도산국민학교의 연혁에는 1918년 3월31일 도산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서 기존에 사용하던 문중(서원)학교 명칭이던 보문의숙이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편&quot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위 교적비에 적시된 개교 일자는 3월3일로 나와 있다. 이는 봄 학기가 시작되는 3월3일부터 사실상 도산공립보통학교라는 교명을 사용하고 수업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도산국민학교 74회 마지막 졸업생 관련 폐교 기사가 나온 매일신문 기사/1993년 2월20일자(토)]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ㆍㆍ《도산국민학교 마지막 졸업식》 안동댐 준공으로 78년 역사 마감​78년 동안 거침없는 성장을 거듭해온 도산국민학교(안동군 도산면 단천리 532번지ㆍ교장 이근필)가 19일 제74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시대변천으로 이농이 심화된데다 지난 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이곳 학구가 거의 수몰, 이번에 5명의 학생이 마지막 졸업식을 하면서 폐교, 재학생 17명은 인근 온혜국교로 옮겼다. 주민들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오랜 전통의 학교가 끝내 문을 닫게 된데 너무 허무하고 아쉽다며 안타까워 했다.​교사들은 학생수가 너무 적어 3복식수업이 불가피한 실정에서 차라리 통합되는 것이 전화위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졸업하는 학생들에게는 후배도 학교도 없다. 교사들은 남겨야할 전통도 받아줄 사람이 없는 졸업생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학교와 후배가 없어도 도산국민학교라는 모교를 항상 가슴깊이 새겨, 오래오래 간직해달라고 했다.​교사ㆍ학부모ㆍ주민, 섭섭함 서로 달래​1916년 국내 제1의 학문중심지인 도산서원 주변에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 그동안 시인 이육사를 비롯, 전 이동진 안동시장, 현 김호길 포항공대 학장 등 훌륭한 인재를 무수히 배출한 도산국민학교였다.78년만에 아무말없이 주인없는 빈집으로 남겨둔채 안동댐 안개 속에 묻혀 한폭의 그림처럼 홀로 세월을 보내게 됐다. 20일부터 8km 떨어진 온혜국교로 미니버스를 이용, 통학을 하게 되는 재학생 17명. 이들은 학구가 진성이씨들의 본거지로 일가 친척이 많아 낯설지 않는데다 이근필 교장(퇴계 종손)이 통합교에 교장으로 부임하게 돼 불행중 다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랜 역사의 모교를 뒤로 한채 인근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어쩐지 서럽게만 여겨진다며 못내 아쉬운 표정들이다.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출처: 매일신문/1993.2.20(토요일) 안동ㆍ이재춘기자(신문 기사 원본 아래 사진 참조)♤신문기사 발굴, 제공: 분천동 종친 이재홍 선생(조각예술가ㆍ대구운암중 교장 정년퇴직)-------------------------------------------------​도산국민학교 구교정은 하계마을의 토계천 다리에서 내살미(옛 지명은 천사 혹은 천곡) 방향 북동쪽 300여 미터 지근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학교 뒷건물 오른편 위에 있는 묘목장 끄트머리에서 보면 멀리 내살미 산하 너머로 단천 동네 오른편 마실 꼬리와 갈선대 그리고 왕모산성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퇴계 선생 후손인 이가순이 계남마실 아래 낙동강 지역(사련진)에서부터 지금 도산면사무소가 위치한 온혜 합강 부근(쌍계: 온계와 청계가 만나는 곳인 합강 지역을 말 그대로 쌍계라고 불렀음)까지를 아홉 구역으로 나눠 이름 붙인 퇴계구곡 가운데 시작 지점인 사련진(퇴계 1곡은 사련진 지역이고 9곡은 쌍계 지역임) 맞은편 멀리 자하봉 끝자락 야트막한 지대에 일제식 단층 목조 건물을 옆으로 길다랗게 건립하여 본관 교사로 사용했다.​계남고택을 교사로 사용했던 보문의숙에서 우리들이 공부했던 도산국민학교 자리로 이전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인 1916년이었다. 이전한 도산국민학교 자리는 퇴계 선생 후손인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1768~1844)이 아홉 구역으로 나눠 통칭한 퇴계구곡 가운데 1곡인 사련진(絲練津) 윗쪽 자하봉 끝자락 지대이다. 사련진은 하계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계남마실 아래 강물이 수북히 모여있는 지역이다. 의인 번남고택 앞에 있는 여울 윗쪽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수몰 전 학교에 다닐 때 헬기 비행기장 오른편 윗쪽 가설극장이 이따금씩 열리던 공터 옆에 있던 의인 앤떼이 바로 상위 지점에 강물이 마치 고무신 모양의 지형에 가득히 고여 있는 것처럼 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 보이던 산 아래 널따란 지대 그 자리이다. 사련진에서 쳐다보면 저 멀리 논밭과 과수원 사이에 도산골의 얼과 정기가 서려 있는 유서 깊은 도산골 학당인 도산국민학교가 다소곳이 위치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태백산 줄기요, 작게 보면 건지산 줄기인 자하봉(紫霞峯) 끄트머리였다. 자하봉은 단천에 있는 월란정사(月瀾精舍) 위에 고적히 자리한 봉우리 이름이다. 위로 올라가면 왕모산성과 갈선대가 나온다. 자하봉 뿌리가 지맥을 타고 천사마을과 하계마실까지 여기 저기에 야산을 만들어 흩어져서 퍼져 있는데 도산국민학교 주변에 있던 산봉우리도 옛사람들은 자하봉이라고 불렀다. 퇴계 선생이 정미년 1547년에 지은 답청등하산(踏靑登霞山ㆍ봄에 푸른 풀을 밟고자 하산에 오르다)이라는 시조를 보면 하산(霞山)이 나온다. 이 하산이 곧 자하산(紫霞山)이요, 자하봉이라고도 했다. 토계 구교정의 뒷산과 옆의 동산도 여기에 해당된다. 구교정 운동장 미끄럼틀이 있던 자리 왼편 담장을 넘어 내살미 가는 사이 길 좌측에 위치했던 교사 사택 뒤안에서 자하봉 산자락이 멈추면서 끝이 난다. 답청등하산 시는 퇴계선생문집&quot속에 있다(퇴계가 평생동안 저술한 작품을 총망라한 문집이다. 퇴계 사후 선조 33년 경자년 1600년에 완성된 선생의 최초 문집이다. 보물 제1894호로 지정돼 있다).​여기서 참고로 도산구곡과 퇴계구곡을 비교해 본다면 도산구곡은 18세기 후반에 명명되어진 듯 하지만 작자는 특정인 한 사람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도산구곡이 수려한 산천을 중심으로 작명되었다면 하계 이가순의 퇴계구곡은 이황의 삶의 흔적을 중심으로 무대가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공통점은 양자 모두 퇴계의 발자취가 깊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퇴계의 고매한 학문의 경지는 2019년 도산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지구촌 시민들이 함께 기리는 학당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을 오가며 걷던 도산구곡의 절반이나 되는 사색의 오솔길은 지금 한국인이 사랑하는 예던길로 다시 태어나 후대들이 선인을 기리며 산행하는 둘레길이 되었다.​하계에 있던 유서 깊은 도산국민학교 구교정은 57회 졸업생(1976.2.13.금ㆍ수몰 전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전설로 남을 토계 시대의 막을 내렸다. 당시 졸업식 분위기를 전하면 한겨울 날은 몹시 추웠고 수몰 탓으로 동무들은 이미 뿔뿔이 타지로 거의 떠난 교정에서 쓸쓸히 남아 있는 몇 명 안되는 학생들이 강추위에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물의 졸업식을 올렸다고 하니 어린 학생들도 목이 메였을 터이고 이를 지켜보는 선생님들도 속으로 아니 우신 분이 없었다고 한다.​졸업식은 본관 뒷편 교사인 일제가 건립한 목조 귀신교실 옆에 있는 신식 시멘트 교실에서 거행됐다. 이따금씩 강당으로도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원래 6학년 1, 2반을 합치면 100여 명 정도가 족히 되었던 적지 않는 인원이었지만 수몰지구로 인해 절반 정도가 이미 타지역으로 떠난 상태에서 반 정도가 남은 50여 명의 학생들로 졸업식을 치렀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한 졸업생이 기억하는 분위기를 필자가 정리해서 기술해본다.​《마지막 졸업식은 1976년 안동댐 준공이 이루어지던 해에 있었다. 수몰로 인해 토계 지역을 비롯해 도산골 면민들이 분주하게 이사를 떠나는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학부모님들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토계 근처에 사는 학부모님들 대여섯 분과 이근필 교장선생님, 이원륜 선생님, 이동후 선생님, 장필모 선생님, 이동섭 선생님, 강위기 선생님, 이재호 선생님 등 남아 계신 선생님들께서 졸업식을 거행하셨다. 분위기는 시종일관 조용하면서도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들도 이 무거운 분위기의 연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사회를 보시는 선생님 외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모두가 이 졸업식이 이 교정에서 치르는 마지막 졸업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타깝고도 목메는 시간들을 모두가 절절히 공유했으리라.​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사를 가야할 곳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시절이었고 또 그러한 상황을 어린 학생들도 눈치로 알고 있었으리라. 졸업식 노래를 부를 때 뒷편에 앉아계시는 학부모님 가운데 누군가가 흐느꼈고 앞에 앉은 어린 학생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여리고도 맑고 아름다운 동심에 슬픈 상처가 났다. 졸업식 노래와 교가가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가운데 졸업식은 끝이 났다. 1909년 문을 연 보문의숙이 1918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되어 개교된 이래 57년 만에 토계 구교정에서 치른 57회 마지막 졸업식이었다. 그리고는 앨범도 없이 수몰의 역사 속으로 가라앉는 교정을 뒤로 한 채로 한 장의 슬픈 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 속에는 신기하게도 57명의 학생들이 남아 있었다. 구교정에서 어린 제자들과 마지막까지 교가를 부르신 선생님은 열 한 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도산국민학교 또한 토계 구교정 시대를 영원히 졸업한 것이다. 구한말, 대한제국시대, 일제강점기, 광복, 6.25, 개발경제시대 등 격동의 근현대사와 함께 하며 파란의 한 세기를 질곡과 영욕의 세월로 점철해 온 도산국민학교가 21세기를 눈 앞에 둔 채 마지막 10여 년의 격랑과 소용돌이를 버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넓디넓은 운동장 앞편 연단 옆에서 57년을 펄럭이던 구교정의 교기는 이렇게 68명의 사제들에 의해 처연하게 내려졌다. 그리고 그날 남긴 한 장의 사진 속에는 도산국민학교 제57회 졸업식 1976.2.13&quot이라고 적혀 있었다.》​단천의 신교정 시대는 이후 18년 동안 고맙게도 터전을 지켜준 몇 명 안되는 후학들로 인해 매년 한 장의 졸업사진을 남기며 가녀리고도 구슬픈 생명을 근근히 이어나갔다.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유산 치고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픈 말로였다. 아~ 가련하고도 애틋하도다. 이제 우리의 어린 후학들은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구교정은 단아하면서도 위풍이 있었으며 정감이 가는 모양새가 아름다운 학교였다. 하지만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현대사가 손을 쓸 수 없는 격변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오랜 역사로 건물마다 정령들이 깃들어 있을 법한 교사와 웅장한 플라타너스 나무들도 급기야는 이 풍진 세상의 희생양이 된 채 돌아올 수 없는 레테의 강을 넘어선 것은 두고 두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구교정은 퇴계 정신이 면면히 흐르는 한국 유학의 본향이라는 본류적인 자부심이 충만한 곳이었다. 그러기에 자연히 도산면민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으며 온혜초등학교(1947.9.11~ )와 그리고 가송분교장(1959.2.2~1996.3.1 온혜초교와 통폐합, 졸입생 485명 배출), 의일분교장(1969.4.1~1995.2.1 폐교), 태자분교장(1969.8.20~1993.3.1 온혜초교와 통폐합, 졸업생 307명 배출) 등을 아우르는 본체 역할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퇴계종택의 차종손인 이근필 교장 선생님께서 늘 친숙하게 우리들 곁에 계셨고 선생님의 자제분 또한 한 교실에서 막역지간 동무로 함께 공부를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자산인지 미처 몰랐다. 마을 마을이 퇴계의 얼이 서려 있어 도산서원이나 다름이 없었고 어부가, 농암가를 읊으며 강호를 벗삼아 은자 같은 말년을 분강촌(분천동에 있던 농암의 분강서원 및 농암종택은 안동댐 수몰로 1975년 운곡 등으로 이전했다가 2007년 농암 문화유적 복원사업으로 현재의 가송리로 모두 재이건함)에서 소요했던 농암 선생의 발자취가 산천 곳곳에 스며져 있어도 그냥 그런 줄 알았고 육사 선생이 사랑했던 백마를 탄 초인과 청포를 입은 고운 임이 이 강산에 다시 오신다며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정결히 하여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그때는 그저 무념하기만 했다.​구교정은 오래된 역사와 도산구곡의 비경 그리고 선비정신 등과 같은 도산이 품고 있는 청징한 풍물적인 지리와 찬연한 정신문화의 유산들이 집적되어 잉태시킨 산물이기에 기품과 기풍이 있었다. 우선 교정 자체가 세월이 묻어나는 목조 건축물인 본관과 당시로서는 신식 교실인 후원에 있는 큼지막한 별관 시멘트 교사, 고상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신ㆍ구식 건축을 조합해서 만든 사옥인 교장사택(70년대는 교감사택으로 사용, 이근필 교장 선생님이 웃토계에서 출퇴근함), 넓디넓지만 황량하지 않고 거목의 플라타너스로 가득한 큰 운동장, 푸른 이끼가 주단처럼 덮힌 묘목장과 운동장 가장자리를 가지런히 둘러싼 늙은 탱자나무 울타리 등 크고 작은 건물만도 아홉 동이나 될 만큼 물리적으로도 크고 넓었다. 기억을 되살려 건물을 기술해보면 본관, 후원 교사 세 동(귀신교실과 좌우 신식 시멘트 교사 ), 본관 바로 뒤 숙직실과 붙어있는 양호실, 숙직실 좌ㆍ우측 큰 화장실 두 동, 사택 두 채(교감 사택과 내살미 가는 길 과수원 초입 왼쪽에 있는 교사용 사택) 등과 양철로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은 교문 오른편(교감 사택 앞)에 있는 펌프 우물 집이 있었다. 이에 비해 이전한 단천 신교정은 시멘트로 지은 본관 교사 한 동에 뒷편 화장실과 창고 그리고 교사용 사택 한 채가 전부였다.낙동강 1300리 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다는 가사리(가송협)의 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 빼어난 협곡과 퇴계의 예던길로 이어지는 그림 같은 대사(단천) 갈선대 그리고 도산서원을 병풍처럼 안고 분강촌(부내ㆍ분천동)까지 펼쳐지는 산수화 같은 고향 산천에 비쳐보았을 때 대사의 신교정은 주변의 경관과는 그리 조화롭지 못한 건물이었다. 지나간 얘기지만 아동들이 줄어들 것을 감안했다면 그때 차라리 서당처럼 고풍스럽게 지었다면 지금까지도 그 쓰임새가 지속되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념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성큼성큼 차오르는 강물 탓에 피난가듯 급히 자리잡아 옮겨지은 교사인지라 당시에는 이것 저것 가릴 겨를도 없었거니와 향후 쓰임새까지는 더욱이 생각도 못했으리라. 지금도 단천에 있는 폐교된 신교정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서 볼라치면 마치 호적도 없이 서자처럼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눈물부터 나온다. 이렇게 볼 때 구교정과 신교정은 규모와 입지로 보았을 때 참으로 대비적이요, 건축미 측면에서도 반백 년이나 앞서 지은 토계 교정이 오히려 더 아름다울 만큼 역설적인 뉘앙스를 준다.​내가 기억하는 구교정의 잊을 수 없는 잔상들은미끄럼틀 옆의 회백색 거목나무인 플라타너스와 모래 깔린 철봉대 및 시소 놀이터, 1973년 즈음에 들여놓은 신식 놀이기구 정글짐, 짙은 검회색 본관 목조건물, 운동장 끝 남동향 사이의 길다란 탱자나무 담장, 소사 선생님이 치시던 종소리, 점심 시간이면 전교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구수한 옥수수 빵을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에 층층이 가득 싣고 개선장군처럼 씩씩하게 교문으로 들어오던 투박한 제무씨(GMC) 검은 산판 차 그리고 귀신교실과 교문 바로 우측에 자리한 펌프 우물 집, 뒷 교사 오른편 자하봉 산자락 내살미 가는 초입에 있던 무궁화 및 측백나무 애기 묘목장, 본관 뒷편 오른쪽 화장실 위 산 밑에 있던 구수한 거름터기, 한겨울 난로에 넣을 장작을 배급 받던 본관 건물 우측 끝 창고, 창고 바로 옆 산비탈 담벼락에 만든 자연 학습 조형물인 용암 분출 화산 모형, 교감 선생님의 고즈넉한 사택 등은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잠의 길목에서 서성거리며 가슴 시린 애수를 자아냈던가. 아~ 선연하도다. 그리운 교정이여~.-----------------------------------------------------[※ 모두가 빈난했던 1970년대, 저학년 때 점심시간이면 유니세프(UNICEF)에서 보낸 옥수수 식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요즘 빵가게에서 판매하는 썰지 않은 대형 식빵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옥수수 식빵 윗부분은 구울 때 열을 받아서인지 누런 갈색으로 변했는데 특히 그 부분이 맛이 있었다. 그런 대형 옥수수 식빵을 보통 두 명이 반으로 나눠서 받았는데 가끔은 개인당 한 개씩을 통째로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기분이 정말 좋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다. 유니세프는 1946년 개발도상국 아동들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설립한 국제 연합의 특별기구이며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다. 유니세프는 이에 대한 공로로 1965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우리는 점심시간만 되면 교문 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행여나 제무시(GMC) 검은 산판차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quot하는 걱정을 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기우에 그치듯이 산판차는 제시간에 어김없이 크락숀을 빵~빵~&quot크게 울리며 씩씩하게 정문을 넘어 본관 앞에 도착했다. 마치 우리들을 향해 이놈들~ 밥 왔다. 밥 타러 오너라~&quot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당번을 보냈고 당번은 자기 몸통보다도 더 큰 대나무 소쿠리에 가득 담긴 식빵을 둘이서 낑낑거리며 들고서 교실로 들어왔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받아서 먹기만 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참 고맙고 신세를 진 국제기구였다. 이제 부지런한 선ㆍ후대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어 지난했던 그 시절 세계시민들로부터 받았던 그 큰 은혜를 다시 빈곤한 지구촌 아이들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현실이 다행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요즘도 학생들에게 국제봉사기구에 대한 수업은 계속하고 있다. 지구촌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마을이기 때문이다.]-----------------------------------------------------​10년의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세월은 정말 쏜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신교정은 강산이 두 번을 변할 시간만큼도 버텨 주질 못했다. 1975년 단천 신교정의 개막은 슬픈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서곡에 불과한 것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듯이 종국에는 1947년 문을 연 온혜국민학교에 1993년 통폐합 되어 사실상 77년 만에 폐교되는 아픔을 겪으며 도산면민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빛나는 역사를 지닌 도산국민학교가 배출한 위인들은 적지 않다. 현대사 이후부터 조명해보면 한국인의 뇌리에 깊숙이 존재하는 청포도 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을 비롯하여 비교적 가까운 근래에는 세계적인 원자핵물리학자 김호길 박사(1947년 15세, 28회 도산국민학교 졸업, 안동중학교 2학년 중퇴,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영국버밍엄대학 원자핵물리학 박사, 포항공대 초대 총장) 등 쉬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총총하다. 어디 그 뿐이랴 우리들의 조부모님, 부모님, 형제자매들까지 모두가 도산 땅을 터전으로 삼아 태어나고 살며 도산국민학교를 다니며 산천과 벗하며 오늘날까지 그 뿌리를 지켜가고 있지 않는가.​일월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우리도 이제 반백 년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그럼에도 잠의 길목에 서성거릴 때면 아직도 언제나 기억의 저편에서 조각조각이 되어 떠오르는 옛 추억의 편린들로 잠못 이루는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돌이킬 수 없는 수몰의 수난사는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엮어놓은 파란했던 삶의 파노라마들을 망각의 강물 속으로 강제로 밀어넣은 채 통째로 묻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도산국민학교가 우리들의 잔상 속에서 언제나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맑디맑은 동심의 나이 때 빈난한 우리들의 가슴에 위안과 사랑과 순백한 동무들을 지순하게 선사한 아름다웠던 그 교정 때문이리라.​지나간 세월은 그립다. 그러나 사라진 것들은 더욱 애잔하다. 오늘 같이 가을 깊고 적요한 날에 소슬한 그믐 반달빛이 가슴을 적셔올 때면 불현듯이 또 떠오르는 구교정의 아린 잔상 때문에 무척이나 헤매이며 슬퍼진다♧.♤사진 종합 설명(caption)첫 번째 사진은 1916년 10월20일 계남고택(일명 계남댁 내지 계남경주댁溪南慶州宅)에 있던 '보문의숙'이 토계리 88번지(토계 '도산국민학교'자리)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여 개교식(보문의숙이 이전한 교사에서 개교식 함)을 거행하는 광경이다. 보문의숙은 1909년 12월 도산서원 자산을 기반으로 진성이씨 문중이 토계 계남고택(계남고택 사랑채)에 설립한 사립 초등교육기관이다. 1909년 설립한 진성이씨 문중의 사립 초등교육기관인 보문의숙은 1918년 3월31일 '도산공립보통학교'로 변경 인가를 받아서 개편, 편입 되었다. 지번은 수몰 전 도산국민학교가 있던 자리인 토계리 88번지였다. 이후 1941년 일본의 국민학교령에 의해 도산국민학교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1975년에는 안동댐 수몰을 앞두고 단천 신교정으로 이전한 후 1993년 74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진은 일제시대 보문의숙에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1918.3.31) 되기 이전인 1916년 10월20일에 촬영한 것이다. 보문의숙은 1916년 10월20일 도산국민학교 자리로 이전하여 개교식을 한 후(이름은 여전히 보문의숙) 17개월 뒤에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편, 편입되었다. 도산공립보통학교의 '개교'는 1918년 3월3일에 했다. 그리고 정식 '개교식'은 당해 연도 9월에 가졌다. 사진 촬영 당시(1916.10.20) 학교 이름은 여전히 보문의숙이었다. 민ㆍ관ㆍ학생이 모두 보이는 희귀한 사진이다. 일제강점기인 만큼 사진 중앙에 검은 제복을 입고 앉아 있는 일본인의 모습도 많이 보인다. 멀리 뒤로 보이는 산세와 왼쪽의 고택 그리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신식 일제 목조 건물이 수몰 전 우리가 보아왔던 도산골 고택 전경과 도산국민학교 본관 목조 교사와 많이 닮았다. 특히 왼쪽 고택은 토계 술도가 바로 위(길 왼편 밭 속)와 버스 정류소 사이에 위치했던 계남고택과 매우 흡사하다. 분천동에서 학교에 다닐 때 계남고택이 길가에 위치해 있어서 늘 시야에 들어왔던 집이라 왠지 익숙하게 다가온다. 길가에서 보았을 때 고택 규모가 매우 크고도 높다랗게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눈에 바로 들어오는 대청마루가 매우 넓고도 높았었다.[첫 번째 사진 출처 : 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안동대학교 박물관)/ 경상북도 안동교육지원청 홈피]위 사진은 1970년대 우리들이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매일 등하굣길에 보았던 계남고택 모습이다. 토계 정류소 아래, 술도가 조금 위에 신작로 왼편에 있었다. 고택이 웅장했고 기품이 있었다. 신작로와 고택 사이에는 탱자나무 울타리와 오동나무 그리고 노간주나무와 측백나무 등이 서 있었다. 계남고택은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인해 1975년 12월31일 단천리 500번지로 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KAST카드 이건했다가 2008년에 다시 안동시 성곡동 730-2번지으로 재이전했다. 지금의 위치는 안동댐 민속경관지 내에 있다. 계남고택은 수몰 전인 1973년 8월31일에 경상북도 민족자료 제8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된 'ㅁ'자형 목조 기와에 민도리 홑처마의 팔작지붕집이다. 계남고택은 당호堂號를 '계남댁溪南宅'이라고 호칭하는데 이는 토계리 하계下溪 남쪽에 자리해서 그렇게 불렀다. 계남고택은 퇴계 선생의 8세손인 이귀용 선생이 지은 종가로 180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 토계의 계남고택은 의인의 '번남고택'과 더불어 도산골의 '양남'으로 불릴 만큼 그 입지와 위상이 대단한 문중이었다.[​두 번째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출처(위 사진): 국가보훈처][출처(아래 사진): 이육사 문학관]​♤사진 종합 설명(caption)한국인이 사랑하는 청포도 시인이자, 일제가 두려워한 의열단[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강렬한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 창단 무렵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 나석주 의사(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의 동양척식주식회사(명동입구 구외환은행 본점 자리) 폭탄투척의거 등 ] 소속 독립운동가 육사 이원록 선생(1904~1944)은 도산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1919년)이다.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아름다운 원촌마실에서 육사는 목가적이고도 웅혼한 시상을 얻었으리라. 그리고 청랭하고 굳센 갈선대의 기상에서는 광야를 달리며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거친 꿈을 품었으리라.황량한 시대에 선구자와 선각자의 삶은 고달프고 처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조국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북경 감옥에서 순국(1944.1.16. 새벽 5시: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한 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위 사진은 1934년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사진과 1941년 북경으로 가기 전 친척과 친구들에게 준 증명사진이다.​♤사진 설명(caption)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2021년 ㆍ81세)는 지금도 육사 선생의 생가를 지키며 아버지의 나라 사랑과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2022년 12월16일 진보중ㆍ고등학교가 주관한 특별 초청 강연 나의 아버지 이육사&quot강연장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이옥비 여사, 오른쪽은 도산국민학교 58회 동창 강수완.[출처: 도산국민학교 58회 동창회 카페]​♤황량한 시대, 선각자의 삶은 고달프고 처연했으리라. 대한민국 정부는 조국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출처: 조선일보(2022.2.3.목.A22)]​[사진1.2.3. 출처: 시리즈.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 카드뉴스. KAST 과학의 거인(2019.10)/ 제공:과학기술정보통신부, KAST 한국 과학기술 한림원,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사진 종합 설명(caption)1985년 포항제철 박태춘 회장의 삼고초려로 세계적 물리학자인 김호길 박사(아호 무은재無垠齋ㆍ학문에는 경계가 없다 : 1933.10.15~1994.4.30)는 포항공대(포스텍)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의 도약을 이끈 제도혁신의 리더였으며 포항에 도산서원과도 같은 공학서원을 만들어서 한국의 우수한 공학도를 육성해낸 한국과학기술계의 거목이었다(출처: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사진4(출처: 임동향우회)는 포항공대가 개교도 하기 전인 1986년 5월4일 포항 효자동 학교 건설 공사 현장을 방문한 영국 마거릿 대처 수상과 함께 한 광경이다. 김 총장이 대학 설립 추진 현황과 연구중심대학모델에 관해 설명하는 모습이다. 포항공대는 1986년 12월3일이 개교일이다. 사진5(출처: 임동향우회)는 포항공대 '학연 체육대회'날 촬영한 김호길 총장의 마지막 모습이다(1994.4.30). 운동장에 마련한 다과 테이블에서 동료들과 체육대회를 보고 있는 광경이다. 이날 발야구 시합에서 아직도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것은 한국 과학계의 큰 손실로 두고두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1994년 한국 과학산업에 공헌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김호길 총장은 도산국민학교(1947년 15세, 28회)를 졸업하고 안동중학교(1947년 4회 입학생, 1948년 2학년 9월경 중퇴)에 다녀서 필자와는 도산국민학교(58회)와 안동중학교(34회)의 선배가 된다.​김호길 박사는 1933년 10월15일 안동군 임동면 지례동에서 김용대 선생의 4남4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고향에는 국민학교가 없어서 아홉 살 때 부친이 만든 사립 소학교인 '지례간이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1943년 4월 고모댁이 있는 토계로 와서 도산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47년 도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해방 직후 어줍잖은 영ㆍ수 교수법과 어지러운 좌우익 사상논쟁에 학교를 다니는데 흥미를 잃고 2학년 9월경 중퇴해서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56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는데 가까이 지낸 학과 동기생으로는 도산서원 원장을 지낸 영덕출신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이 있다(92세ㆍ2025. 4.14 작고).♤수몰 전 도산국민학교 토계 구교정에서 있었던 마지막 졸업식 사진이다. 57회 졸업생이었으며 1976년 2월13일 금요일날 졸업식을 치렀다. 나이로 본다면 2020년에 58세가 되는 셈이다​♤사진 종합 설명(caption)본관 건물은 흘러간 일월과 함께 영원 속에 안치되었다. 위 고추밭은 아래 사진인 본관 건물이 있던 곳이며 넓었던 운동장 일부도 포함돼 있다. 그 옛날 저 고추밭 대신 큰 운동장이 펼쳐져 있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웅장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학교의 울타리가 되었고 한여름에는 우리들의 더위를 식혀주는 그늘진 쉼터가 되어주었다. 미끄럼틀 옆에 작은 산만큼이나 컸던 회백색 몸체의 당당한 플라타너스 나무가 그립게 다가온다.[출처: 어느 유튜버님이 올린 영상을 순간 캡쳐 해서 포스팅 함]​♤사진 종합 설명(caption)보문의숙은 1918년 3월31일 '도산공립보통학교'로 변경 설립 인가를 받아서 개편, 편입 되었다. 이른바 본격적인 도산국민학교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본 교정은 57년 만에 토계 시대의 막을 내리고 단천 신교정으로 이전한 뒤 18년 만인 1993년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수몰의 수난사가 찬연한 역사를 전설 속으로 삼켜버린 것이다. 구교정의 전경이 아직까지도 눈에 담을 듯이 선연하기만 하다.​두 번째 사진은 1972년 도산국민학교 전경이다. 본관 건물이며 중앙에 교무실이 있었다. 제일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문이 추운 겨울날에 난로에 넣을 장작을 받기 위해 각 학급 당번들이 매일 아침에 조회가 끝난 후 찾아가서 줄을 지어 서서 장작을 배급받던 고마운 창고이다. 그때 장작을 나눠주시던 소사 아저씨 김성연 선생님은 참 순하기도 하셨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리고 토계 지서 아래 (기름방 윗쪽 맞은 편, 약방 아래 맞은편, 도산면사무소 맞은편) 위치했던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물이 백운이발관(백낙원 원장님)이다. 도산면민 모두를 이발해주시던 그 어르신도 성정이 참 좋으셨는데...​세 번째 사진은 본관 건물 좌측(교문 왼편 펌프 옆)에 구식인 목조물과 신식인 시멘트 자재가 어우러져 만든 당시로는 세련된 현대식 건물인 교감 사택(1970년대 우리가 다닐 때는 교감 사택이었지만 원래는 교장 사택임)이 있었다. 이 건물은 그동안 개보수를 해서인지 2021년 현재까지도 당시의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이종구교수의 에.. 다른글현재페이지 1234♧이종구교수의 에세이 산책/ 그대 떠나보내고 참꽃이 필 때면(상)댓글(3)♧이종구 교수의 문학 산책/ 도산국민학교의 개교기념일(1918.3.3)을 기리다댓글(7)♧이종구의 문학산책/ 도산국민학교 교가댓글(5)♤새벽 꿈결에서 본 도산국민학교 가을운동회~댓글(2)♧이종구교수의 앵코르 폴 스케치/캠퍼스 잔디 위엔 또 다시 황금 물결~댓글(5)♤꿈에 본 도산국민학교 가을운동회 ~(이종구)댓글(1)Encore essay/ 별이 빛나는 밤에댓글(3)Re:♧이종구의 에세이 산책/댓글(1)Re:♧이종구의 에세이 산책/ 김형석 교수님의 100세 일기댓글(2)♧이종구교수의 에세이 산책/ 김형석 교수님의 100세 일기댓글(3)거실에서 비 내리는 것 보니 (이종구)댓글(1)♧이종구의 에세이 산책(앙코르 특집)/ 앙팡테리블의 음지와 양지(3부/마지막회)댓글(8)♧이종구의 에세이 산책(앙코르 특집)/ 앙팡테리블의 음지와 양지(2부)댓글(5)♧이종구의 에세이 산책(앙코르 특집)/ 앙팡테리블의 음지와 양지(1부)댓글(4)♧이종구의 문학산책/ 아름다운 소통(2019.11.27)댓글(7)♧이종구의 문학산책/ 도산별곡(2020.5.16)댓글(5)♧이종구의 문학산책/ 도산국민학교 교가(2015.3)댓글(1)Re:♧이종구의 문학산책/ 도산국민학교 교가(2015.3)댓글(1)♧이종구의 문학산책/ 분강촌(2020.3.10)♧이종구의 문학산책 / 어깨동무(2020.5.3)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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