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주의가 눈 뜬 장님 만든다
카메론 디아즈, 드루 베리모어, 루시 리우. 이 세 명의 섹시한 여배우가 ‘미녀 3총
사’ 속편 ‘맥시멈 스피드’로 올 여름 한국 관객들을 사로잡을 것 같다. 이 세 명의
미녀들이 맡은 임무는 FBI 증인보호 프로그램 프로파일을 훔쳐 그 중 다섯 명을
살해한 범인을 잡는 것. 세 미녀는 적의 시선을 아름다운 자신들의 자태에 집중
시키기 위해 고대 그리스 풍 드레스와 롤러걸 복장, 이브닝 가운으로 갈아입고
임무 수행에 나선다. 보통 액션 첩보 영화에서 여주인공들이 소위 미인계를 써서
상대방의 초점을 흐린 다음 공격에 들어가지 않는가.
이는 우리의 주의 집중이 감정에 의해 조절 당하는 효과를 활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거리를 걷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미니스커트 입은 여성에게 눈길이
머무는 것, 매력적인 이성이 눈앞에 나타났거나 혹은 예전의 애인과 비슷한 사람
이 지나갈 때, 순간 그 피사체만 보이고 시야의 나머지는 완전히 안 보일 수도 있
다. 이렇게 관심 있는 것에 집중되어 있어 관심 없는 물체를 시야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을 ‘부주의적 장님’이라 한다.
눈앞에 박사사탕이 있다고 가정하고 바라보자. 우리가 박하사탕을 인지하는 과
정은 이렇다. 박하사탕에 반사된 빛이 눈의 렌즈와 망막을 통해 대뇌의 후반부에
위치한 ‘주 시각 대뇌피질’이라는 시각뇌의 영역 일부에 도착한다. 여기에 박하
사탕에 관한 정보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이지만 ‘주 시각 대뇌피질’을 지나면
사물에 관한 정보는 약 25개의 뇌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이 25개의 영역은 크
게 둘로 나뉘는데, 머리 위쪽에 있는 부분은 주로 사물의 위치와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아래쪽에 있는 부분은 사물의 형태나 색깔, 구조에 관한 정보를 받아들
인다.
그렇다면 하얗고 마름모인 박하사탕을 볼 때 그 사물이 ‘하얀’과 ‘마름모’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나뉘어 인식되지 않고 ‘하얗고 마름모인’ 박하사탕이라는 하나의
물체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유력한 이론은 사물에 반응하는 많은 시
각뇌 영역들의 활동 형태 그 자체가 그 사물의 영상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
물을 본다는 것은, 과거에 그 사물을 인식하고 기억한 내용을 연상하는 과정이
다. 박하사탕을 보면 ‘박하사탕 세포’가, 연인을 보면 ‘연인 세포’가 있어 반응하
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박하사탕을 보면 과거에 이루어진 박하사탕에 대한 기억
정보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지금 망막에 맺힌 영상이 ‘박하사탕’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관심 있는 것만 본다, 부주의적 장님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영상은 피사체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따라
그 중요성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교차로에서 녹색이 적색으로 갑자기 바뀌는 교
통신호등은 단순히 하나의 색깔에서 다른 색깔로 바뀐 것이 아니라, 정지하라는
명령의 의미를 지닌다. 신호등의 적색은 멈춰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어겼을 때
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해져 기억되는 것이다. 또 거리
를 걷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에게 눈길이 머무는
것 또한 우리의 주의 집중이 감정에 의해 조절당하기 때문이다.
1989년 시몬즈란 학자는 여러 사람이 공 뺏기 놀이를 하는 도중 슬며시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을 그들 가운데에 넣어 보았다. 공놀이가 끝난 뒤 놀이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고릴라에 대해 물으니, 그들 중 고릴라의 존재를 의식했던 사람은 불
과 42%뿐이었다. 그들이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을 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하지
만 그 영상을 뇌에서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공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릴라 상을 시야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이렇게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되
어 있어 관심 없는 물체를 시야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을 ‘부주의적 장님’이
라 한다.
우리의 뇌에서 관심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려내고, 이 중 덜 중요한 것을 삭제
하는 일을 하는 곳은 ‘전두엽(이마엽)-두정엽(마루엽)회로’이다. 결국 뇌의 감각
중추에 전달된 정보들은 전두엽-두정엽 회로, 혹은 감정 중추 등으로부터 조절
당하고 편집된다. 이는 방송이나 신문에서 취재하고 입수한 수많은 정보 가운데
중요한 것만을 추려 편집하는 행위와 같은 방식이다. 이러한 뇌의 작용은 자신에
게 중요한 정보에 대해 효과적으로 집중하려는 진화적 전략으로 풀이된다.
익숙한 것은 안 보인다, 습관적 장님
‘습관적 장님’이라는 현상도 있다. 이것은 습관적인 자극이 계속되는 경우, 달라
진 부분을 보지 못하는 현상이다. 대부분 결혼하면 남편들은 아내를 습관적으로
보게 된다. 연애 시절에는 상대방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결혼하
고 나면 서로의 존재가 습관처럼 익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서로에게 긍정적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가까이에서 늘 바라보면서도 실제로는
상대를 보고 있지 않은 ‘습관적 장님’ 상태에 있게 된다. 습관적 장님 현상 또한
우리의 주의 집중이 감정에 의해 조절 당하는 데서 비롯된다. 같은 상황을 보더
라도 자신의 감정과 의식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현상을 보면 ‘마음의 눈’이
라는 것이 은유적인 비유만은 아닌 것 같다.
글│곽문주 joojoo@powerbr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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