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사람은 누구일까?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정답은
헤지펀드 투자회사인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제임스 사이먼스 대표다. 소득조사업체
‘알파 서베이’ 자료에 따르면 사이먼스 대표는 지난해 25억 달러(약 2조9000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놀라운 것은 그가 경제나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수학자 출신이라는 것이다.
사이먼스는 미국 하버드대 수학교수로 재직하다 금융계에 뛰어들어 경이적인 실적을
올리고 있다.
◆‘최고의 직업’이 수학자라고?
사이먼스 대표의 작년 수입은 세계적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 회장의
연봉 5480만달러 보다 수십배나 많은 액수다. 사이먼스 대표가 이처럼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수학을 이용해 복잡한 금융 메커니즘을 정확히 예측해 투자했기 때문이다.
금융업계의 ‘퀀트(quants)’는 수학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분야다. 퀀트는
‘수량으로 잴 수 있는’이란 뜻의 영단어 퀀터테이티브(quantitative)와 분석가(Analyst)
에서 나온 말이다. 수학을 이용해 시장을 읽고 금융상품을 만들며 가격을 결정하는 터라,
수학자들이 선호된다.
미국에서는 수학자가 최고의 직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구직전문사이트 커리어캐스트
닷컴의 조사 결과 수학자는 미국의 200개 직업 중에 최상의 직업으로 뽑혔다. 이 조사
에서 수학자는 오염된 연기나 소음이 없는 곳에서 일할 수 있고, 연간 수입(중간 값)도
9만4160달러에 달하는 고소득직으로 분류돼 최고의 직업으로 꼽혔다.
◆복잡한 금융상품, 수학으로 설계한다
한국 금융계에서도 수학 전공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수학 전공자들의 진로는 금융
·보험 업계는 물론 경영 분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수학자들이 금융·보험상품을 만들고,
주식 투자의 적기를 계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수학자의 도움으로 생산비용을 줄이는
기업도 있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 낡은 책을 옆에 낀’ 수학자 이미지는 구식이 된지 오
래다.
신한은행 금융공학센터 퀀트팀에서 일하는 강병국(38) 과장은 서울대 수학과 출신이다.
그는 여러가지 방정식을 사용해 옵션상품들을 풀고, 직접 연습장에 계산을 하며 파생상품
을 만들고 있다. 강 과장은 “현재 퀀트팀원 6명 중 2명이 수학전공자"라며 “수학과 박사
출신 2명 등 수학전공자 4~5명이 이미 퀀트팀을 거쳐갔다”고 말했다.
◆수학 실력이 기업 경쟁력 좌우
보험업계의 ‘계리사(計理士)’도 수학 전공자들이 강세를 보이는 분야다. 계리사는 보험
상품을 설계하고, 고객이 낸 보험료를 어떻게 관리할지 등을 계획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이때문에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이 유리하다. 삼성생명에서 계리업무를 맡고 있는 황두순
(28)씨도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황씨는 “업무에 확률과 통계를 많이 활용하기 때문에
수학을 잘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며 “계리사 시험 합격자나 현재 계리업무를 하는 사람
중에 수학과나 통계학과 출신이 많다”고 했다.
서울대 수학과 출신인 황용운(28)씨는 지난 달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선호하는 한 외국계 보험회사에 지원해 합격했다. 황씨는 입사한 회사에서 보험금 지급을
위해 보험료의 얼마를 회사가 비축해 두어야 하는지를 계산하는 등의 일을 할 예정이다.
경영학이나 경제학 전공자가 전담할 것 같은 업무를 수학 전공자가 맡고 있는 것이다.
황씨는 “면접 때나 입사한 후에 보니, 비슷한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 중에 수학과 출신
이 다른 전공보다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말했다.
- ▲ 최근 수학자들의 금융업계 진출이 활발해 지고 있다. 사진은 여의도 증권가 풍경 / 조선일보 DB사진
수학은 경영에도 요긴하게 활용된다.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의 경영기획실
에 근무하는 장영재 박사. 미국 MIT공대에서 ‘확률이론을 통한 생산운영 분석’이라는 연구
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장 박사는 작년 수학의 ‘스케줄링 이론’을 활용, 생산라인의
작업순서를 효율적으로 교체했다. 그 결과 회사는 수십억원의 비용 절감을 이루어 냈다.
장 박사는 “수학 선진국에서는 수학자들이 기업에서 여러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확률
·통계 등의 수학을 이용해 의사를 결정하는 기업들은 기획업무에 수학자들을 선호한다”고
했다.
◆수학을 홀대하는 나라엔 미래 없다
우리나라는 아직 광범위한 분야에서 수학 전공자를 선호하거나 우대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 학부과정에서 수학을 전공한 대학생들의 정규직 취업률은 대체로 대학 전체의
취업률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낮은 수준이다.
수학과 학생들은 “기업에서는 주로 응용수학 출신을 선호하기 때문에 순수수학이 강한
학교는 취업률이 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외국계 보험사에 취업한 황두순씨도 “수학을
전공해서 업무에 많은 도움을 얻고 있지만, 수학 전공이 취업후 회사에서 특별히 우대
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대부분의 수학과 출신들이 교사나 학원강사직을 택했다. 금융권에
많이 진출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광운대 수학과 허민 교수는 "요즘에는 금융수학,
보험수학, 통계학과 접목시켜 직업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며“은행권
에서도 출신학교보다는 수학이라는 전공에 주목해 채용하는 경우가 느는 것 같다"고 설명
했다.
서울대 수리과학부 김명환 교수는 “현대수학 역사가 이제 50년 정도 된 한국에서 수학자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수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생긴다면 그 위상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chosun.com 이영민 기자 ymlee@chosun.com 김병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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